반응형
절절하지 않으면,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 아니면, 울컥 치솟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.
여백 도종환
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
나무 뒤에 말없이
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.
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
넉넉한 허공 때문이다
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
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
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
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.
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.
비어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.
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
흔들리며 피는 꽃
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
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
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
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
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
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
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
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
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
처음 가는 길
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.
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.
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.
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.
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
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.
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
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.
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
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.
시화선집<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?>
반응형